우리는 보통 예의를 갖추기 위해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저도 한동안은 그 표현이 가장 정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어를 배우고,
수어 커뮤니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농인이에요."
처음에는 왜 굳이 다르게 부르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이름 하나에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담겨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1. '청각장애인'이라는 말이 가진 시선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 초점을 둔 말입니다.
의학적 기준에서 보면
청력이 일정 기준 이하로 떨어지면 청각장애에 해당합니다.
이 표현은 기능의 결핍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상태,
치료나 보완의 대상이라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이 단어에는
"못 듣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먼저 붙습니다.
물론 이 표현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행정적, 법적 맥락에서는 필요한 용어입니다.
다만 이 단어가 담고 있는 관점은
의료적 모델에 가깝습니다.
무엇이 부족한가,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2. '농인'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시선
반면 '농인'이라는 표현은 조금 다릅니다.
'농인'의 의미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고,
수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들리지 않는 것을 '장애'로 규정하기보다
수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언어적 소수자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미국 사람이 영어를 쓰고,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쓰듯,
농인은 수어라는 언어를 쓰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소리가 중심인 세계가 아니라
시각이 중심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안에는 고유한 문화와 소통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농인'이라는 단어는
결핍이 아니라 정체성을 중심에 둡니다.
3. 왜 '농인'이라는 이름을 선택할까
수어 수업을 들으며 한 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고쳐야 할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농인이에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농인'이라는 이름에는 스스로를 설명하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나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존재라는 선언.
수어는 그들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눈입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
빛과 움직임, 표정과 공간을 읽어내는 언어.
그 언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농인'이라는 이름은 자부심이 됩니다.
4. 난청이면 모두 농인일까?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청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모두가 농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난청은 의학적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농인은 문화적 정체성에 더 가까운 개념입니다.
보청기를 사용하며 음성 언어 중심으로 살아가는 분도 있고,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청각장애인이 농인은 아니고,
모든 농인이 자신을 장애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존중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구분 | 청각장애인 (Medical) | 농인 (Cultural) |
| 관점 | 장애, 치료, 극복의 대상 | 언어적 소수자, 고유한 문화 |
| 언어 | 구어(말하기) 권장 | 수어(Sign Language) 중심 |
| 정체성 | 들리지 않는 사람 | 수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
마무리하며
우리는 오랫동안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수어를 배우며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관점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을요.
'청각장애인'은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고,
'농인'은 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름을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선택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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